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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생각 Ethos

도약의 한계, 오도일이관지



자기계발 성공학에서 이야기하는 돈오(도약)는 무엇인가?


1) 내가 진정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미래를 확정한다.
2) 최고의 미래가 실현될 것을 안다.
3) 행동한다.
4) 이루어진다.


여기서 핵심은 무엇일까? 바로 2번.최고의 미래가 실현될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영역, 확신의 영역이 아니다. 믿음과 확신을 넘어서는 앎의 경지다.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다. 최고의 미래를 실현하고 싶다고는 하지만, 막상 행동하지 못하는 경우 말이다. 이들은 앎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했다. 즉, 도약하지 못한 것이다.


최고의 미래가 실현될 것임을 진정으로 안다면, 어떻게 행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하나다. 지행합일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더는 수행할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도약의 힘이다.


돈오(단번에 깨달음)하면, 무수(無修)다. 더는 닦을 게 없다.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면, 더는 수행할 게 없다.



그럼 지금부터 도약의 한계와 위험성을 전달하고자 한다.


실제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으려고 선방에 들어간다. 돈오하면 무수라 하지 않았는가? 단번에 깨닫는다면 더는 닦을 게 없는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서 말이다.



선방은 3~4평에 불과하다. 문을 자물쇠로 채워 외부로 나갈 수 없다. 스마트폰, TV를 금지하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다. 책조차 볼 수 없다. 선방 구멍으로 하루 한 끼를 공급받는다. 이 상태로 1000일을 수행하게 된다.


결국 수행 중에 죽는 사람들이 발생한다. 돈오의 문제는 무엇인가? 평생 수행해도 돈오하지 못하면 끝이다. 진리를 보지 못한다면, 과거의 모든 수행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불교 수행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모든 분야에는 이치라는 것이 있고,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도약이 필수로 요구된다.


문제는 돈오는 혼자서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혼자서 깨닫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오래 공부하고 많은 책을 읽고 경험이 늘어난다고 돈오하지 못한다.


그래서 멘토를 잘 만나야 하는 것이고, 인연이 중요한 것이다.


자기계발서 수백 권 읽는다고 인생이 바뀔까? 실제로 바보 되는 경우가 흔하다.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고 목표만 비대해진 망상병 환자가 된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독서를 한다고 하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독서를 해도 인생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걸까? 맥을 짚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문리가 트여야 한다. 물론 스스로 트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빠르게 맥을 짚으려면 멘토를 잘 만나야 한다.



문제는 인간에게 한탕주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빠르게 도약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원하는 것을 빠르게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비트코인을 하고, 대출해서 주식 투자를 하며, 마진거래, 해외선물을 한다. 극단적인 수익률을 얻어 인생 역전을 꿈꾸며 말이다.

시크릿을 통해 끌어당김의 법칙을 알게 되고, 트랜서핑과 같은 있어 보이는 책을 보게 되며, 어느덧 호오포노포노를 읽으며 무의식을 정화하고, 데이비드 호킨스를 접해 의식의 지도를 탐구하며, 에크하르트 톨레 책을 보며 현존과 참나를 쫓게 된다. 참나를 알게 되면 인생의 고통이 해결되고 원하는 삶을 얻게 될 거란 착각에 빠진다.

스님들은 소승불교, 대승불교를 던져 버리고 간화선 하나로 돈오에 이르기 위해 선불교만을 쫓는다. 경전 공부 등한시하고, 초기불교의 위빠사나를 무시한다. 선 하나로 깨달으면 끝이 난다고 생각한다.



분명 누군가는 빠르게 돈오한다. 그러나 그것은 극소수에 해당하는 일이다. 빠르게 돈오하는 사람을 보며, 나 또한 빠르게 돈오할 거란 착각. 그래서 빠르게 도약하려는 욕심. 그리고 그 욕심으로 인하여, 오히려 가장 멀리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 자칫하면 평생 방황만 하다 인생이 끝나게 된다는 사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도약의 시기와 맥락을 잘못 잡으면 인생이 패망한다.



공자는 어느 날, 자신의 제자 증자에게 말한다.

吾道一以貫之
오도일이관지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뚫었다.”

제자인 증자는 답한다.
“그렇습니다.”


이에 대해 남회근 대사는 『논어 별재』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공자는 증자가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제자가 깨달았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제자에게 말한다.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뚫었다.” 증자는 스승의 말을 알아듣고,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깨달음이 공명된 것이다.

이는 부처가 꽃을 들었을 때, 그 의미를 헤아린 마하가섭의 미소와 같다. 염화미소, 이심전심 말이다.


공자는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라는 말을 통해, 돈오무수의 이치를 제자에게 보인다. 하나()로써 꿰뚫었다는데, 도대체 하나()가 무엇인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런데 증자는 또 알아듣는다. 문자를 거치지 않고, 직관적으로 단번에 이치를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증자만이 예외일 뿐, 공자는 다른 제자들에겐 돈오(단번에 깨달음)의 이치를 전하지 않았다. 왜 공자는 돈오를 가르치지 않았을까? 제자들이 돈오한다면, 빠르게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에 대해 다음 글에서 전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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